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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작가 전시

by 웰타임 202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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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작가의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갔습니다.

김영선의 그림은 화려하고 섬세한 작품과 화려한 추상 작품으로 나뉜다.

"Flower River"와 "Flower" 시리즈는 화려하고 세련된 작품이라면 "Don't Go"와 "Long After That" 시리즈는 눈부신 추상 작품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한한 시선과 무한한 고민을 표현합니다. 김영선은 캔버스와 장기(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표현하는 무한한 시선을 이룬다. 일반적인 추상회화와는 다른 기법이다.

추상화는 사물의 공통된 특성과 본질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추상회화는 실재의 본질을 표현한 비구상적이고 반사실적인 회화이다.

일반적으로 화가는 "구상-반구형-반추상-추상"의 단계를 거친다. 김용순은 그 단계는 지났지만 그가 추구하는 추상과 표현기법은 일반적인 추상회화와는 전혀 다르다.

일반추상은 기법을 단순화하여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다면, 김영석의 추상은 사물을 단순화함과 동시에 복잡하게 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이분법적으로 표현한다.

김영석은 무한한 시선과 무한한 초점으로 단순함과 복잡함의 이율배반적인 극한의 미의식을 추구한다.

물론 이것은 인도하는 의식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 표현되는 작품은 극단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품은 조형미, 서정적 정서, 친밀한 이야기, 몽환적인 감성, 섬세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Jin Yongshan의 그림은 주로 기하학적으로 단순화 된 추상화 기법과 서정적이고 복잡한 수묵화 기법을 기반으로합니다.

그렇다면 김영석은 화면에서 단순함과 복잡함의 이중성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김영석의 무한시점과 무한초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무한시점을 기본으로 한다.

<Hwa>원형 캔버스에 순수한 원색으로 칠해진 연작의 시선과 초점은 무한하다.

김영석은 수직의 무한점에서 수직의 꽃을 응시한다. 이 작품은 관점이 없습니다.

(관점 제거됨) 꽃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관심을 받습니다. 꽃과 화가의 대화는 끝이 없다.

그리하여 원형의 캔버스는 생명의 꽃이 지닌 영혼의 울림으로 가득 차게 된다.


칸딘스키의 캔버스처럼 캔버스가 살아있고, 캔버스 위의 꽃들도 살아있다.

그녀의 김영석<Hwa> 단일시점과 단일초점은 연작에서 깨지고 무한시점과 무한초점이 선택된다.

이렇게 하면 캔버스 중앙과 주변에 작용하는 힘이 고르게 균형을 이룹니다.

그 결과 긴장과 대립이 사라지고 평화와 화합이 드러난다. 그러나 화가는 꽃에 내재된 무한요소(x)에 주목할 수 있을까?

김영석은 꽃의 모든 요소에 무한한 신경을 썼다고 한다.

무한시점(infinite perspective)은 피사체가 무한한 수의 시점에서 사물을 보는 경우를 말하며, 무한초점(infinite focus)은 피사체가 가까운 사물과 멀리 있는 사물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비관점과 다릅니다.

단일시점과 단일초점의 비원근법과 달리 무한시점과 무한초점이 가능한 것은 작가의 시선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화가의 시선은 제로 시선, 단일 시선, 다중 시선, 무한 시선을 포함한다. 여담으로 김영석은 대상을 하나로 단순화하거나, 대상을 다수 또는 무한대로 나눈다.


그런 다음 공감각을 통해 거리를 조절하여 같은 각도와 거리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1미터 앞이나 1,000미터 앞에 있는 물체를 같은 시점과 초점으로 그립니다.

김영석의<Hwa>그리고<Stop Walking> 무한한 원근법과 무한한 초점의 추상적 표현입니다.

이는 구상 구상회화에서 표현적 추상회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습득한 서정적 추상표현주의의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김영석이 (정지된 평평한 사각형에) 표현하는 것은 움직이는 물체이다. 김영석은 어떤 대상이든 무한한 시간 속으로 끌어들여 그 대상과 함께 무한 운동을 한다. 그러면 완벽하게 채워진 평면이 역동적이고 무한한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평평한 직사각형의 두 차원인 폭 x, 높이 y(높이 z는 포함하지 않음)는 시간 t에 세상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김영순 회화의 본질은 시간(t)이 평면(x, y) 위에서 무한히 움직이는 김영순의 추상 화풍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의 무한한 시선과 무한한 초점이 가능해야 한다. 현실에서 무한히 산만해지고 시야를 무한히 넓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한 유일한 공간은 정사각형 계획입니다. 인간은 처음에 마음의 화면(정사각형 평면처럼 보임)을 통해 모든 것을 인식합니다.

김영석이 대표하는 추상회화는 시공간에 무한히 움직이는 네모난 평면(x, y, t)이다.

추상화의 본질은 3차원 현실(x, y, z)을 평면(x, y)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김영석은 일반적인 추상에 표현주의적 추상을 가미하여 추상표현주의에 진입하였고, 서정적 추상표현에 서정적 추상표현주의를 더하였다.

그러나 김영석은 유화 대신 먹을 사용했기 때문에 '묵서정적 추상표현주의'가 되었다.


김영순의 추상표현주의는 대상 없는 서정적 직관에서 비롯된다. I. Kant의 미학적 개념에서 금용산이 추구한 수묵적 추상표현주의는 사물의 존재가 없는 직관적 표현의 예술이다(ohne Gegenwart des Objekts).


여기서 얻은 아름다움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입니다. 작가의 미학의 자유유희와 관객의 미학의 자유유희가 만난다.

이는 화가의 주관적 감정과 일반적인 지혜가 일치하여 발생하는 현상이다.

여기서 회화적 미학은 반성적 판단(reflektierende Urteilskraft)으로 빛난다. 김영석의 수묵화 서정적 추상표현주의는 갈 길이 멀지만 희망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있다.





아래는 김영석 작가님과 같은 한국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국화>

한가는 한국의 전통 기법과 형식으로 그린 ​​그림의 총칭이다.

흔히 동양화라고 하는데 이 경우 일본 우키요에나 중국화를 포함할 수 있어 다소 모호하다.

사실 아주 넓은 의미의 한국화는 고분벽화까지도 한국화로 그릴 수 있다.

<고대>

고대에도 한반도에는 늘 그림이 그려졌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고분 벽에 고분벽화가 그려져 있다.

현재 100여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남아 있으며 고구려 사회와 양반과 서민의 삶, 사후세계를 염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천마, 신라 행진곡 등의 그림이 말을 타고 남아 있다.

고분벽화에 나타난 소주의 이야기와 고구려 여인상을 보면 삼국시대 회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화가나 화론은 많지 않다.


<중세>

불교가 발달함에 따라 많은 불교 유물이 남겨졌습니다.

통일신라 국보 제196호가 있다.

고려 시대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불상은 귀족들의 사찰에 안치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관음보살상을 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수묵화와 달리 고려시대의 불화는 섬세하고 풍부한 색채에 금니와 각종 안료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부터 현대 한국화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때에도 채색화는 존재했지만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문인화와 유교적 질서를 형상화한 수묵화가 성행하였다.

특히 Dong Dongchang의 Nanzong 이론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영향은 문인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김홍도는 남북을 오가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조선 말 귀국 후 장승엽 등 중국 초상화의 방향을 따랐다.

조선 후기의 민화나 불화와 같은 흔한 민화도 민화의 혼합 양식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한국화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로 남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백색 가루를 많이 사용한 스투코 회화가 유행한다.

동시에 이 시기는 가오시동(高西東) 등 화가들이 일본에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건너간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의 일본 총독부는 독립을 막기 위해 독립을 요구하는 연설을 탄압하고 고유의 색을 강조한 그림을 장려했습니다.

이 시기에 안정식, 조석진 등의 화가들이 유명해졌고,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이상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퐁이 유명해졌습니다. San은 활동적입니다.

용우는 유명해졌다.

그들은 또한 매우 활동적입니다. 그중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이상범은 신문 삽화와 징병 독려로 친일사전에 이름을 남겼다.


<1950년대>

해방 이후 미술계에 한국화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해방 후 한국 미술계는 세 가지 큰 도전에 직면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일본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한국문화를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문화를 민족통합의 수단이나 이데올로기 확산의 수단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문화가 한국에서만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 당시 미술계의 큰 문제는 한국 동양화단에 등장한 이른바 '일본의 미의식'이다.

쉽게 말해 1950년대 동양화단은 한국화단의 특성을 살리면서 동양화에서 일본화단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자연스럽게 '한국 동양화'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었다.

대표적인 기사 중 하나가 1954년 8월 5일 청강진영지가 《서울신문》에 실은 기사이다.

그는 『현대 동양화의 진수: 한국 민족화의 시급한 정립』에서 '동양화'라는 명칭 자체가 일제강점기의 잔재임을 밝히고, '한국화'라는 용어를 공식 명칭.

민족문화를 만듭니다. 이후 그는 '동신문'에서 "그림 이름에 대해: 한국화의 시급한 양식"이라고 답했고, '경향신문'에 실린 김기창의 기고문에는 "산수화가 아닌 동양화"라고 답했다.

그는 "동양화가 아닌 한국화"라는 글에서 한국화라는 용어를 정립했다.

졸린 청년 하김용기는 한국화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그의 1970년대 한국화론은 동양화단의 젊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영기의 입장과 달리 당시 미술평론가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이는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의 냉담함이라기보다는 동양화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반응이었다.

예를 들어 윤희순은 1946년 『한국미술사연구』에서 서양화에 비하면 동양화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일본 동양화와 한국 동양화의 유사성을 식민주의의 잔재에 기인한다고 인식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후 미술비평의 경향, 이른바 '미술근대화'이기도 하다.

동양화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과 더불어 특정 작가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 무렵 Kiyota 이상범의 그림은 일본의 Nankagiri와 유사한 표현을 표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나는 이념적 문제와 겹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설상가상으로 50년 전쟁과 그에 따른 한국의 정치적 혼란은 한국 동양화단이 독자적인 예술 이론에 기초한 회화상을 제정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1970년대>

1970년대 정치적 변화는 한국 동양미술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문화 지원을 문화정책으로 삼았다.

이는 고미술에 대한 관심에 비해 근대 동양화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미미한 해방 후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미술협회 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쟁점은 국전 동양미술부의 구체적인 영역과 비구상 영역의 구분이다.

특히 이 문제는 동양화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대결은 기존의 국전과 국전 제도를 변화시켜 동양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대결로, 일반적으로 이러한 제도는 집요하고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묵림회 회원 서세옥은 젊은 작가의 대표주자다. 쉬시위는 동양화의 추상화를 통해 산수화가 지배하던 동양화단을 변화시킬 수 있고, 한국 특유의 '한국화'를 계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1970년대 초반의 한국화가 전체적으로 동양화의 개념을 언급하기보다는 새롭거나 전위적인 동양화라는 의미에서 기존의 동양화를 대체했음을 의미한다.

1971년 이경성은 『조선미술잡지』에 『미술개관 - 한국화의 가능성』을 기고했는데, 이는 그런 의미에서 한국화를 비판하는 것과 다름없다.

같은 해 박용숙은 『신동아시아』, 『한국화 존중-한국화의 기원과 개념』을 기고하며 국전과 상충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한국화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한국화'라는 용어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국화 자체가 신진 작가들의 작품에 한정된 용어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부 그림에서 가끔 언급됩니다. 이로부터 조선시대의 그림을 조선화라 하고 충변관식의 그림을 조선화라 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당시의 한국화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었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1970년대 한국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이들 용어의 혼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0년대 이후 유리의 대량 생산과 서양식 거울 액자의 인기로 집에서 한국식 거울 액자를 걸어두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이러한 한국식 액자와 나전칠기가 가정을 상징하는 탈것이 되었다. 지금도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오래된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1980년대>
1979년 말 동양화단에서 '한국화'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한국화'라는 용어는 특정 화가나 특정 시대의 그림이 아니라 한국의 동양화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1983년에는 한국화라는 용어의 쓰임새가 바뀌었다.

먼저 교육면에서는 1981년 12월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1983년 동양화를 한국화로 개편하였다.

미술계에서는 1982년 한국미술전람회에서 동양화를 한국화의 범주로 등재한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이후 한국화라는 용어는 동양화와 관련된 각종 전시, 회고전, 특별전 등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80년대에 한국화라는 용어는 보통 한국에서 태어난 모든 동양화를 통칭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러한 변화의 좋은 예입니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를 위해 『한국 현대미술사: 동양화』라는 책을 펴냈다.

그러나 1984년 개정되어 재간행되면서 책 제목이 "동양화"에서 "근대한국화"로 바뀌었다. 불과 7년 사이에 용어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Art World"의 1985년 11월호에 실린 Li Shijiu의 기사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한국화의 현황을 진단하면서 “한국화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지 몇 년이 됐다”고 지적했다.

한화의 어원을 논할 때 정통으로 여겨지는 이 견해는 최근까지 논란이 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한국화 논의는 (김영기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 문화정착의 문제, 그리고 한국이 당면한 3대 이슈와도 연결된다. 1950년대 한국 미술계.

이후 한국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까지 제한적으로 사용되다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동양화단에 안착했다.

김영석 작품1
김영석 작품1

 

 

 

 

 

 

 

 

 

 

김영석 작품2
김영석 작품2

 

 

 

 

 

 

 

 

 

 

김영석 작품3
김영석 작품3

 

 

 

 

 

 

 

 

 

 

김영석 작품4
김영석 작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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